◈ 독일의 신용조합 ◈
1. 독일 신용조합의 태동
영국을 소비조합의 나라, 프랑스를 생산조합의 나라로 부른다면 독일은 신용조합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용조합이 먼저 발생하고 발전하였기 때문이며 독일에서 신용조합이 먼저 발생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발도상국에서도 신용조합이 먼저 조직되고 있는데 이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산업혁명은 영국보다 1세기나 늦은 1850~1870년경에 시작되었다. 독일 산업혁명의 특징은 봉건주의적 제도가 아직 많이 남아있는 토대 위에서 발달된 공업기술이 영국으로부터 이식 접목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독일의 산업혁명은 농업에 있어서는 수공업적 생산형태가 광범위하게 잔존한 가운데 도입된 공업기술을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나갔다.
농업부문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공업부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독일의 서부는 일찍부터 농노해방이 이루어지고 농업의 자본주의적 발달도 이루어졌으나 동부는 서부의 과잉인구가 이주하여 영주적 농기업으로 발전함으로써 독일의 근대화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 상업의 발달, 교통의 발달은 식량 증산과 상품생산적 농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반면 농지를 더욱 세분화시켰다. 특히 서부의 소농지대는 경영의 집약화가 진행되고 과학기술이 진보함에 따라 농업기술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19세기 초 테아가 처음 도입한 윤작법과 리비히가 발명한 화학비료 등이 그것이다. 또한 신기술이 도입되고 아울러 식량수요가 증가하여 곡물가격이 상승함에 따라 농업인의 생산의욕이 높아졌다.
이러한 사회적․기술적 변화로 인해 농업인들의 생산의욕은 높았으나 이를 물적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자본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농업인들은 부득이 비료, 농약, 종자를 구입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상인으로부터 고리자 금을 빌려야만 했다. 이 때문에 생산증대와 높은 곡물가격으로부터 얻은 이익은 결국 상인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협동조합으로서의 신용조합 조직의 필요성이 등장했던 것이다. 반면 동부의 영주적 대농경영은 이러한 문제를 독자적 으로 해결해 나갔다.
결국 독일은 후진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부 지역에서는 봉건주의적 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자본주의화가 진행됨에 따라 독립 소생산자에서 전락한 임금노동자들을 받아들일 만한 경제적 기반을 충분히 갖추지 못하였던 것이 다. 그에 따라 독립 소생산자들을 어느 정도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는 대책이 요망 되었는데, 이와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발생한 것이 생산자 협동조합이다.
영국과 다른 점은 임금노동자의 분화가 영국만큼 급격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소비조합의 필요성이 영국보다 덜했고, 프랑스와 다른 점은 자본주의의 진전이 더뎌 규모가 커져 가는 기업에 대응하기 위한 생산조합의 필요성이 덜한 반면, 부분적 협동이 필요한 생산자조합이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생산자조합 가운데 서도 자본축적이 미진하여 소생산자들에게 자금을 융통해 주기 위한 신용조합이 먼저 발생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지도자는 도시 신용조합의 슐체 델리치와 농촌 신용 조합의 빌헬름 라이파이젠이다.
2. 독일 신용조합의 선구자
(1) 슐체 델리치(1808~1883)
슐체 델리치(Hermann Shulze-Delitzsch)는 농촌 신용조합의 창설자인 라이파이 젠과 더불어 도시 신용조합의 창설자로서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협동조합운동 사상 길이 남을 선구자이다.
슐체는 처음에는 출생지인 델리치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습재판관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때 그는 노동자, 독립수공업자, 소상인의 경제상 태를 조사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국회조사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그들이 빈곤에서 허덕이는 주요 원인이 고리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정계를 떠나 신용조합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래서 1849년 델리치시에 목공과 제화공의 원료구매조합을 설립하였다. 이 조합은 무한책임 조직으로서 자금을 차입한 후, 원료를 대도시 도매시장에서 현금으로 대량 구입함으로써 중간상인의 이윤을 배제할 수 있었다. 그후 그는 원료의 공동구 매만으로는 수공업자의 어려움을 타개할 수 없음을 깨닫고 1850년 구매자금을 빌려주는 대부조합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독일은 물론 세계적인 도시 신용조합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또 자기가 초안한 협동조합법을 의회에서 통과 시켜 신용조합에 대한 최초의 법적 기초를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슐체가 설립한 초기의 신용조합은 조합원의 상호연대책임에 의한 자조․자립적인 조합이기보다는 부자들의 기부금이나 무이자의 외부차입자금에 의존하는 조합으로 설립되어 운영되었기 때문에 다분히 자선적이고 구제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오래 가지 못하고 쇠퇴하여 갔다. 여기서 자조정신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슐체는 자조․자립적인 정신을 기르기 위하여 조합원에게 일정한 금액의 출자를 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슐체계 도시 신용조합은 점차 그 기반을 굳혀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슐체계 도시 신용조합이 성공하게 된 원인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가) 조합원이 수공업자로 경제적 약자이긴 하지만 노동자로 전락하지 않아 독일의 완만한 자본주의 진행과정에 합리적으로 대처하면 그 지위를 보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 자조정신에 입각한 사회연대적 협동조합의 설립을 강조하고 실제로 그에 기초하여 조합을 운영하였다.
(다) 과거의 협동조합 운동가들이 공상적이거나 사상적․이론적인 것에만 그친데 비해 슐체는 이론은 물론이고, 이론에 기초를 둔 협동조합을 실제로 조직하고 실천에 옮김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2) 빌헬름 라이파이젠(1818~1888)
빌헬름 라이파이젠(Wilhelm Raiffeisen)은 독일 농촌 신용조합 및 협동조합 중앙 금고의 창설자요, 농업협동조합의 사실상의 원조로서 농업협동조합사상 가장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라이파이젠은 농업인의 아들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일선 행정기관의 서기를 거쳐 읍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읍장 시절 그곳의 주민 대부분이 농업인이었기 때문에 농촌경제를 상세히 관찰하고 연구하였다. 그 결과 농업인의 대부분이 자금이 없어 농사철 비료․농약․종자를 외상으로 구입하고 수확후 고리로 변제하는 한편 농산물은 상인에게 저가로 인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비참한 환경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849년 농촌고리채 해소 운동의 일환으로 푸람멜 스펠드 구제조합을 만들어 자금 대부사업을 개시하였고, 헷데스돌프로 전임된 뒤인 1854년에는 그곳에서 헷데스롤프 자선조합을 설립하여 농업인 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때까지의 라이파이젠의 신용조합은 자선적이용, 도덕적 성질을 강하게띤 것으로서 부자들의 기부에 의해서 조합이 유지되었다. 부자의 기부행위는 한정된 것이어서 무제한 이에 의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그는 슐체의 상호부조조합 개설 소식을 듣고 의견을 교환하여 자조․자립의 원칙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862년에는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안하우겐을 비롯한 4군데에 신용조합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세계 최초의 농촌 신용조합으로서 근대적 농업협동조합의 시초가 된 것이다. 이 조합은 출자나 가입금은 없었으며 조합원의 연대 책임으로 조합 운영 자금을 차입하여 충당하였다. 따라서 조합원이 아니면 대출을 받을 수 없으며, 조합 재산은 조합원의 총유로 하였고, 이익금은 기금으로 전액 적립하였다.
조합은 상호교류를 목적으로 한 부락단위의 소규모 조직이었다. 신용의 기초는 예금에 두고 예금의 장려로 대부를 하였는데 바로 이 점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라이파이젠 신용조합은 농업인을 위한 농촌 신용조합이었던 까닭에 그 성격이 농업인 본위였음은 물론 그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색채가 농후하였고 도덕적 요소도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합의 성격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잘 융화시키는 작용을 하여 라이파이젠 조합을 성공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 점이 슐체의 도시 신용조합과 다른 점이다.
라이파이젠 조합은 신용사업이 주된 사업이었지만 신용사업의 발전을 토대로 구매, 판매, 이용사업을 겸영하는 종합농협으로 발전함으로써 세계 농업협동조합의 원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라이파이젠의 조합운영 원칙은 로치데일 운영원칙과 더불어 오늘날 세계 농업협동조합의 운영원칙으로서 그 기초를 확립한 것이다. 라이파이젠 협동조합 운동의 성공요인은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 라이파이젠협동조합 운동의 성공요인
① 영세한 자영농이 다수 존재하였다는 점
②협동조합운동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신념
③높은 신앙심과 이를 바탕으로한 도덕성과 윤리성
④이상과 현실의 적절한 조화 등
3. 신용조합의 발생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선구자들이 설립한 협동조합이 생성과 소멸을 거듭한 후 후계자들에 의해 근대적 협동조합의 발생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협동조합이 늦게 발생하였기 때문에 선각자들이 창시한 협동조합이 바로 근대적 협동조합 으로 발전하였다.
슐체계 협동조합은 처음에는 도시 소생산자들의 원료구입 조합으로 출발하여 도시신용조합으로 발전하였으며, 나중에는 생산물의 판매를 위한 판매조합을 겸영함으로써 중소기업자의 신용구매판매조합이 되었다. 그러나 신용사업이 주류였음은 물론이다. 그후 슐체계 조합은 1859년에 연합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연합회에는 신용조합 외에 그 동안 발생한 수공업자나 노동자 소비조합도 가입하여 회원조합수가 800여개에 이르렀다. 물론 가입조합의 대부분은 신용조합이었다. 그런데 1920년경에 이르러 슐체계 연합회에 가입했던 노동자 소비조합들은 슐체계의 소시민적 성격에 불만을 품고 대부분 탈퇴하였다. 이에 따라 슐체계 협동조합은 다시 도시 신용 조합을 중심으로 한 중소기업자의 조합이 되었다.
나치 정권하에서는 예금 수집과 공채 인수를 주축으로 하는 제도금융을 담당하였 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다시 많은 발전을 하였으나 슐체의 이념이 많이 약화 되고 신용조합보다는 중소기업자조합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해졌다.
신용사업을 주축으로 출발하여 구매․판매 사업을 겸영하는 종합농협으로 발전한 라이파이젠계 협동조합은 신용․지도․구매 등 세 가지 사업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신용사업 부문은 개별조합의 자금 과부족을 조절하기 위하여 1876년에 개별조합을 주주로 하여 주식회사 형태의 농업대부금고를 설립하였다가 신조합법이 마련됨에 따라 1889년에는 연합회조직을 독일농업중앙대부금고로 개편 하였다. 그 후 1923년에는 다시 독일 라이파이젠은행으로 개칭하였으며, 1922년에는 라이파이젠 생명보험은행도 설립하였다. 개별조합의 지도감독을 위한 중앙회는 1877년 농협대표연맹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조직되었는데 신조합법에 따라 1889년에는 독일라이파이젠협동조합총연맹으로 개칭되었고, 1910년에는 본부가 헷데스돌프에서 베를린으로 옮겨갔다.
구매사업 중심의 물자공급을 위한 연합회로서는 1881년 라이파이젠 거래회사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가 1917년에는 라이파이젠 물자배급경제연맹으로 개칭되었다. 라이파이젠계 조합은 신용조합을 주축으로 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가) 농촌 협동조합 운동으로서 중농계층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
(나) 신용사업이 중심이면서도 80% 이상이 여러 가지 사업을 겸영하고 있어 농협, 특히 종합농협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다) 조합의 기본성격도 지역적 연대성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이는 조합재산의 공유개념과 함께 농업의 사회화를 유도하는 사회민주주의 사상에 접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독일에는 하스(W.Haas. 1839~1913)계의 농협이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법률학을 전공하였으나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고 농업인과 밀접히 접촉하였고, 라이 파이젠의 생존시에는 그의 사상에 따라 주로 농촌 구매조합의 설립에 힘썼으며, 1872년에는 헤센 지방에서 농촌구매조합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스는 라이파이젠이 종교적 색채가 너무 강한데 불만을 품고 이를 수정한 농협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1883년에 라이파이젠조합의 연합회와는 달리 조직된 독일농협연맹인데, 이것은 1890년 독일농협전연맹으로, 다시 1903년에는 독일농협제국연맹으로 개칭되어 라이파이젠의 총연맹과 대립하였 다. 이 때 제국연맹 산하에는 10,000개 이상의 협동조합이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공황, 격심한 인플레 등에 영향을 받아 1930년에 라이파이젠 협동조합과 통합이 이루어졌다.
하스는 1888년 라이파이젠이 사망한 이후에는 독일의 농협운동을 전담하다시피 하였고, 라이파이젠의 운영원칙을 많이 수정하여 운영하였다. 특히 그는 라이파이젠과 같이 극단적으로 출자를 배격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슐체와 같이 출자에만 편중하지 않는 절충제도를 채택하였다. 협동조합운동이 정치적․종교적 파벌투쟁과 대립에 휩쓸리지 않도록 운영하는 지혜를 보였으며, 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인 중앙집권주의를 배척하고 지방조직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지방분권주의를 택하였다.
이와 같이 라이파이젠 협동조합 사상에 하스의 협동조합사상이 가미된 독일의 농협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하스계라는 명칭이 없어지고 모두 라이파이젠계로 통일 되었다. 그후 서독 정부는 1949년 특별법을 제정하여 협동조합에 중기성 자금을 공급해주는 독일협동조합은행을 설립하였으며, 라이파이젠계 협동조합은 독일라이파 이젠 중앙연맹을 정점으로 계통조직을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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