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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의 생성 - 영국의 소비조합

많은 협동조합들이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과 함께 생성․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각국의 자본주의는 그 발생과 성립과정이 다른 만큼 협동조합도 각기 다른 형태로 발생되고 발전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유럽에서부터 발전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협동조합운동도 유럽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하였다. 각기 다른 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사회적․역사적 환경에 따라 영국에서는 소비조합이, 프랑스에서는 생산조합이, 그리고 독일에서는 신용조합이 발생하였다.

 

◈ 영국의 소비조합 ◈

1. 영국 소비조합의 태동

소비조합은 영국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고 발전하였다. 이는 영국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빈곤한 서민들이 경제적 자구책을 마련 한데서 출발한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1764년 하그리브스(J. Hargreaves)가 손으로 실을 짜내는 수방 적기 대신 기계에 의한 방적기를 발명함으로써 지금까지 가내수공업 형태였던 면방적업을 공장제 공업으로 전환시킨 데서 출발하였다. 그 후 면사의 대량 생산은 옷감을 짜는 방직기의 발명을 촉진하여 카트라이트(Cartwright)라는 사람이 방직기계를 개발함으로써 방직업도 1787년부터 기계화되어 공장제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기계의 사용은 동력부문에서 와트(J. Watt)라는 사람이 수력을 증기기 관에 응용하였으며 기계를 만드는 원료인 철은 18세기 후반 다비(Darby) 부자가 용광로를 개발함으로써 생산분야에서도 본격적인 혁명이 이루어졌다. 즉 가내수 공업적 생산이 공장제 기계공업 생산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수송분야에서는 1807년에 풀턴(R. Fulton)이 증기선을 발명하고, 1813년에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발명함으로써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산업혁명은 각 분야에서 상호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진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국에서는 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출현하고 찬란한 기계문명이 발전하였으며, 인간은 일찍이 보지 못한 대중적 소비생활을 향유하게 되었다. 재산의 소유제도에서도 신분에 의한 봉건적 대소유의 특권이 타파되어 돈 있는 자는 누구나 재산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다. 인간사회의 실질적인 민주주의 제도가 마련된 것이며 그들은 오랫동안에 걸친 인류의 숙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산업혁명은 이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운명에 시달리게 되었다. 신흥 산업도시의 발달과 농촌의 쇠퇴가 바로 그것이었다. 공장이 설립되고 있던 도시에는 노동자는 물론이고 중소기업자 상인들이 모여들어 서민계급을 형성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는가 하면, 농업부문에서는 식량을 생산하기보다는 공장제 대량생산의 원료가 되는 양모를 생산하는 것이 더 유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경지를 양을 치는 방목지로 전환해 가는 가운데 농촌은 황폐화되고 추방된 농업인은 도시로 흘러나가 저임금의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도시에 운집한 그들은 소위 산업예비군으로서 가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근대적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못한 도시는 불결하고 비위생적이어서 각종 질병이 그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도시근로자들의 노동조건이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대량으로 생겨난 노동력은 임금을 점점 하락하게 만들었다. 반면 농경 지의 목장화로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 국내 자급마저 어렵게 된데다 지주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1815년에 곡물조례를 제정하여 고율의 관세를 수입곡물에 부과함으로써 곡물가격이 폭등하여 노동자들의 생계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따라서 노동자 들은 전 가족이 노동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기업주는 기계화된 생산과정 속에서 고임금의 성인남자보다는 임금이 싼 부녀자와 어린이 노동력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부녀자와 어린이의 노동문제가 발생하였다. 부녀자나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노동현장에 나가 하루 15~16시간의 노동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산업혁명의 결과 신진기업가들은 일시에 생산수단과 거대한 자본을 가진 거부가 되어 사회의 상층계급을 이루었다. 반면 자영농이나 소규모 생산자들은 노동자로 전락하여 노동력 이외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사회의 하층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 노동자 계급은 산업혁명 이전 수공업공장의 직공이나 농업인 과도 다른 처지에 놓이게 됨으로써 당장의 생활이 궁핍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래에도 기업주가 될 가능성이 없었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점차 고도화되어감에 따라 그들은 더욱 빈곤해지게 되어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은 완전한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이 모색한 활로는 두 가지였는데 한 가지는 노동조 건을 개선하고 임금을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한 노동조합운동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그나마 벌어들인 노임이 부당하게 지출되지 않게 하기 위한 소극적 노력의 일환인 소비조합운동이었다. 영국에서 노동조합운동과 소비조합운동이 가장 먼저 발생하고또 발전한 것도 이러한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영국에서 소비조합이 맨 처음 설립된 시기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시기와 비슷한 1769년이며 최초의 소비조합은 스코틀랜드의「펜 위크」라는 한 조그마한 농촌에서 기독교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공장노동자들이 설립한 식량공동구매조합(Fenwiek Weaver's Society)이다.

그 후 1795년에는 헐(Hull)시의 빈민들이 공동출자하여 밀을 공동으로 구입하고, 이것을 제분함으로써 상인들의 부당한 이윤을 배제할 목적으로 공동조직인 제분소(The Hull Anti-Mill Society)를 세웠다. 그래서 조직의 명칭도 자본가들의 제분소를 반대한다는 뜻에서「제분소 반대 조합」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에도 이러한 유형의 소비조합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나 대부분 친목단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단순히 조합원의 생활필수품을 저렴하게 구입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었기 때문에 근대 소비조합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상을 갖지는 못하였다.

그 때문에 이때의 소비조합을 소비조합운동의 기원으로 보기는 하지만 근대적 소비 조합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 이후에 발생한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을 최초의 근대적 소비조합으로 인정하고 있다.

 

2. 영국 소비조합 운동의 선구자

(1) 로버트 오웬(1771~1858)

로버트 오웬(Robert Owen)은 1771년 상업도시인 뉴타운에서 마구상겸 철물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 그는 부모슬하를 떠나 점원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19세 되던 해에 맨체스터에 있는 방직공장의 지배인이 되는 수완을 발휘하였다. 29세가 되던 1800년에는 뉴 라나크의 수차방적공장을 사서 직접 경영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공장을 평소에 꿈꾸었던 모범촌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의 공장에는 약 2,000명의 노동자가 있었는 데, 그들은 나태하고 빈곤하였으며 무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종파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어린아이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 이 때문에 그는 박애 주의적 노동조건과 노동시설 그리고 노동자 교육을 실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루의 노동시간을 l0시간으로 제한함과 동시에 아동교육에 막대한 비용을 투입하여 노동 자들의 복지를 증진시켜 나갔다.

그는 또 뉴 라나크에 일종의 소비조합을 조직하고 각종 생활필수품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일반상인들보다 20%나 저렴하게 공급하여 노동자들에게 이익을 주고 수익금 중 상당액을 교육비로 충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생산과 소비를 직결시킨 뉴 하모니 협동촌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1824년 12월 그는 아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825년에 인디애나주에 2만 에이 커의 토지를 사서 협동촌을 건설하였다. 이것이 바로 협동조합 역사에서 매우 유명한 뉴하모니 협동촌이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그 원인은 그의 이상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상품생산의 거대한 기구 속에서 기부금이나 개인의 사재를 투입하여 자급자족적인 격리촌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유재산과 상품생산을 두 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개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 그곳 사람들은 개인주의적 생활습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런던에 돌아와서 국민공평노동교환소를 개설하였 다. 오웬은 당시 사회의 결함은 자본주의 경제의 특징인 이윤의 존재와 자유경쟁에 기인하며, 이 양자는 서로 관련되어 사회악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화폐제도를 없애고 물물교환을 하여 가치척도를 변경 하고 분배와 시장의 가격관계를 시정하여 노동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보상받음으로써 실업자가 없는 이상사회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고 국민공평노동교환소(National Equitable Labor Exchange)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각 생산자인 조합원은 자기 생산품을 교환소에 가지고 와서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 물품의 가치를 결정하고 서로 교환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도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 으나 직접적인 원인은 각자가 투입한 노동시간을 계산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2) 윌리엄 킹(1786~1865)

윌리엄 킹(William King)은 협동조합 사상사에서 로버트 오웬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영국협동조합 사상사 또는 영국협동조합 운동의 발전에 오웬 못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킹은 1786년 중등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의사가 되어 브라이튼에서 개업하 였다. 그는 의사이면서 협동조합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로버트 오웬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

오웬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제자들이 그 사상을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소비조합을 조직하였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운동이 윌리엄 킹의 조합매점운동이다.

킹의 구상은 조합원들이 매주 회비를 내서 기금을 만들고 일정한 액수에 달하면 이것으로 상품을 구입하고 공동판매소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긴 이익금은 공동의 자본으로 하여 사업을 늘려간다. 그리고 필요한 자본금은 출자금과 이익금 으로 조성해 나간다. 자본이 많아지면 토지를 매입하여 거기서 거주하며 스스로 경작하고 각종 제품을 생산하여 모든 의식주에 대한 욕망을 충족할 수 있다는 것이 었다. 이와 같이 초기 킹의 궁극적 이상은 공동생산체의 실현에 있었다.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는 1827년 브라이튼에서 170명의 동지와 같이 소비조합의 일종인 공동 매점(Union shop)을 설립하고 조합매 점운동을 확산시켜 1832년에는 500여 개소로 확대하였다.

또한 그는 조합원에게 협동조합 사상을 교육시키고 노동자들을 계몽할 필요를 느끼고, 1825년 5월 월간잡지인 협동조합인을 발간하여 그 자신이 편집하고 또 자신이 집필하여 협동조합 사상의 보급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러나 킹의 협동조합운동도 종교적 색채가 강한 사상, 미숙한 조직과 경영 방법 등으로 실패한 조합이 속출하였고, 잡지도 1830년에 폐간되고 말았다. 이로써 킹의 협동조합 활동도 1830년을 기점으로 일단 중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서 오웬과 킹의 주요한 차이점을 살펴보면 오웬이 일체의 기성종교를 부인하고 사회의 핵심단위인 가족이라는 것에 관해서도 비판적이었으나, 킹은 기독교의 복음서에서 설교하는 바가 그대로 협동조합의 정신과 윤리라 하였으며 가족을 사회 생활의 토대로서 존중하였다. 그리고 오웬은 하층 노동자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그들을 지도하고 교육시켜주지 않으면 몹쓸 인간이 되어버린다고 단정하였으며, 정부나 부유층의 원조를 얻어서 협동조합 운동을 촉진하고자 하였다. 이에 반하여 킹은 노동자는 자력으로 자금, 지식, 경영능력을 갖출 자질이 있다고 믿고 작은 일부터 시작하여 자조와 상부상조를 통하여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오웬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혹독하게 비판, 부정하면서도 사회발전 과정의 필연적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교육이나 자선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던 반면, 킹은 영국시민사회의 발전에 순응해서 이 시민 사회의 한계 내에서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조직적으로 발전시킨 현실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그의 사상은 협동조합 사상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그의 조합매점 운동은 로치데일협동조합 설립 이전의 운동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3)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의 탄생

영국 협동조합 사상사에 있어서 근대적 협동조합의 결실을 보게 된 것은 1844년 영국 랭커셔주의 로치데일이라는 소도시에서 동맹파업에 실패한 28명의 직공이 세운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이다. 이 조합의 정식 명칭은 Rochdale Society of Equitable Pioneer이다.

그들은 자기가 받는 임금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1계좌당 1파운드씩 출자하여 28파운드의 자금을 만들어 일용품을 구입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조합원에게 판매하였다. 그들은 과거에 설립된 협동조합의 실패를 교훈삼아 운영함으로써 비로소 성공한 것인데, 이 조합상점이 세계 협동조합 사상, 특히 소비조합 사상 불멸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것이다. 특히 상부상조의 자치․자조의 운영원리는 근대적 협동조합으로서의 확고한 기틀을 다졌던 것이다.

이와 같이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이 경이적인 발전을 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영국의 자본주의가 소비조합이 발전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을 거의 완료한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인구의 대부분이 공업노동자로서 도시에 집중되어 대공장에 취업함으로써 이들의 조직화를 촉진할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둘째,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이 1844년에 설립되었던 바, 펜위크의 기계공조합이 설립된 1769년 이후 70여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 동안 실패를 거듭해온 다른 조합들의 경험을 살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일련의 운영방침이라고 볼 수 있는 원칙을 정립하여 새로운 협동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의 발족에 즈음하여 28명은 후일 로치데일의 선언 혹은 강령이라고 불리고 있는 일종의 규약을 준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조합의 목적과 사업은 조합원의 금전적 이익 및 그 사회적․가정적 상태를 개선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조합원은 필요한 자본을 한 사람이 1파운드씩 출자하여 다음의 여러 계획을 실행하기로 한다. 

1. 식품이나 의류를 판매하는 점포를 개설한다. 

2. 가정적․사회적 상황의 개선을 목표로 상호간 협동하기를 바라는 조합원이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다수의 가옥을 건축 혹은 구입한다. 

3. 조합이 결정한 물품의 생산사업을 실시하여 실직하였거나 대폭적인 임금 인하로 곤궁에 빠진 조합원에게 직업을 준다. 

4. 조합원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합은 1개소 혹은 그 이상의 농지를 구입 또는 임차하여 실업상태에 있는 조합원이나 노동자에게 경작시킨다. 

5. 실행가능성을 고려하여 생필품의 생산․공급, 교육 및 정치적 역량을 늘려간다는 것 등이다. 


이와 같은 내용 속에는 오웬의 사상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1827년 킹이 브라이 튼에 설립한 공동매점의 경영과도 궁극적 목적면에서 같은 점이 있다.

또한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에서는 오늘날 로치데일 원칙이라고 하는 일련의 운영 지침을 정립하였는데, 이 가운데 구매액 비율에 의한 잉여금 환불제도는 오웬의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원칙은 로치데일 사람들이 실천 속에서 도출한 것이기 때문에 후일 로치데일 원칙이라 부르게 되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이전의 협동조합과 달리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협동조합 운영원칙을 정립하고, 이 원칙 하에서 점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8대 운영원칙을 정립하였는데, 이 원칙들은 협동조합 시스템의 지속적인 유지와 점포사업의 상업적 성공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성과를 가져다 주었다.

◈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8대 운영 원칙 ◈

제1원칙 ·민주적 운영 : 출자 규모에 관계없이 1인1표의 의결권

제2원칙 ·개방된 조합원제도 : 소액의 출자금만 납입하면 조합원으로 가입

제3원칙 ·출자에 대한 이자 제한 : 출자배당을 5∼8% 이내로 제한

제4원칙 ·이용고 배당 실시 : 이용 실적에 따라 잉여금을 배당

제5원칙 ·현금거래 원칙 : 시가에 의한 현금거래, 외상거래 금지

제6원칙 ·정직한 상품만 공급 : 품질을 속이지 않고 정직한 상품만 취급

제7원칙 ·교육의 촉진 : 조합원에게 협동조합 운영방식 등을 교육

제8원칙 ·정치적·종교적 중립 : 정치와 종교에 대해서 중립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8대 운영원칙을 살펴보면 오늘날의 협동조합 제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운영원칙은 조합원이 주권을 갖는 협동 조합 시스템을 유지시키고, 소매점을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사업전략을 마련 하기 위한 두 가지의 필요성 때문에 도입되었다. 

먼저 개방된 조합원제도는 보다 많은 소비자를 조합원으로 끌어들이는데 적합하였다. 소매점 운영에 있어서 다수의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므로 이 원칙은 소비자협동조합의 사업전 략으로써 적절하였다. 이용고배당 제도는 잉여금의 배당을 물품의 구입량에 비례시 킴으로써 오늘날 마일리지 제도와 유사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정직한 상품만을 취급한다는 원칙은 제품에 이물질을 섞거나 수량을 속이는 행위가 만연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협동조합 사업의 신뢰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인 1표 방식의 민주적 운영 원칙과 자본에 대한 이자 제한 원칙은 협동조합이 일부 대주주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다수의 조합원에 의해 지속적으로 소유·통제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여 주었다. 현금거래 원칙은 이전의 협동조합들이 과도한 외상판매로 파산한 경험을 교훈 삼아 도입되었다. 교육 촉진의 원칙은 협동조합 운영에 대한 조합원의 이해를 높이는 역할을 하였으며, 정치적·종교적 중립 원칙은 불필요한 사상적 논쟁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조합이 다양한 고객을 조합원으로 유치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이와 같이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8대 운영원칙은 소비자협동조합의 운영에 적합한 방식으로 제정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 원칙들은 이후 농업협동조합과 신용협동조합을 비롯한 다양한 협동조합에 적용되었으며, 그 결과 오늘날 협동조합 제도 및 운영원칙의 전형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의 협동 조합 원칙이 로치데일 협동조합 원칙에 근간을 두고 제정됨으로써 그 파급효과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초기 협동조합 역사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게 된 데에는 운영원칙의 제정뿐만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사업전략도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소매점을 체인화하여 전국적인 판매망을 구축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소매업자들은 판매점을 하나씩 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에 비해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지점 점포를 개설하여 사업규모를 급속히 늘려 나갈 수 있었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은 또한 도매협동조합(Cooperative Wholesale Society, 이하 CWS)의 설립을 통해 도매사업에도 진출하였다. CWS는 가격이 싼 식료품을 해외 에서 수입하여 국내에 공급하였으며, 해외의 홍차 재배지를 직접 소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선주가 운송비를 인상하자 CWS는 즉시 독자적인 해운업에도 진출하였다. CWS는 나아가 직접 제조업자가 되기도 하였다. CWS는 신발과 의류, 비누, 가구 등 노동자들의 생필품과 관련된 제품을 주로 생산하였다. CWS는 아울러 일부 생산협동조합을 인수하여 제조업 분야에 대한 진출을 더욱 확대하기도 하였다.

로치데일 협동조합의 성공 배경에는 법률적 지원도 커다란 몫을 차지하였다.
1852년 영국에서는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법으로 평가받는 산업 및 공급조합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이 제정되기 이전 협동조합은 우애조합법의 적용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우애 조합법은 사업체가 아닌 상호부조단체를 규정하기 위해 고안된 법이었기 때문에 소비자조합들은 사업과 관련하여 적절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예를 들어 우애 조합법에서는 소비자조합이 조합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물품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산업 및 공급조합법은 협동조합에 대해 중요한 법적 보호장치를 마련해주었다.
이 법은 협동조합의 재산권을 보호해주었고, 협동조합 규범에 법적 구속력을 인정해 주었다. 또한 협동조합 예금에 대한 보호장치를 마련해주었고, 협동조합이 비조 합원에게도 물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리고 조합의 법적 지위를 인정 하여 관료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대항할 수 있도록 하였다. 조합원들에 대한 출자 배당을 5% 이하로 제한하였지만, 구매에 따른 이용고배당은 폭넓게 허용하였다. 아울러 모든 조합원들이 조합의 부채에 대해 무한책임을 지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며, 출자는 조합원당 100파운드 이내로 제한하고 있었다. 그러나 1862년 이 법이 개정 됨에 따라 조합원들의 책임은 유한책임으로 바뀌었다. 즉, 조합원들은 법 개정으로 자신의 출자금 범위 내에서만 조합의 채무를 부담하면 되었다. 또한 출자의 제한은 200파운드로 상향되었으며, 협동조합이 다른 협동조합에 투자하는 것이 허용되었 다.
한편 로치데일 공정개척자조합은 그 후 주로 기독교사회주의자들에 의하여 발전 해오다 1852년에는 협동조합의 대헌장이라 할 수 있는 유명한 산업 및 공급조합법이 제정됨에 따라 법인격을 취득하게 되었는데, 이 법률이 바로 세계 최초의 협동조합법이다.

그 후 영국의 소비조합은 발전을 거듭하여 연합조직을 가지게 되었으며, 1863년에는 북영도매연합회가 설립되었고, 이것이 1873년 개칭되어 현재의 영국도매연합회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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