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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협동조합의 발생, 프랑스의 생산조합

◈ 프랑스의 생산조합

1. 프랑스 생산조합의 태동

소비조합의 형태를 취한 협동조합이 영국에서 먼저 발생한 반면, 프랑스에서는 생산조합 형태의 협동조합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영국의 소비조합이 영국의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소산이라면 프랑스의 생산조합은 프랑스의 산업혁명과 그에 의한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소산으로서 양국간에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전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산업혁명은 영국보다 50~60여년이나 늦게 일어났고 또 영국만큼 급속하고도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프랑스의 산업혁명은 1789년의 대혁명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공업부문에서는 대혁명을 계기로 중세 수공업자들의 동업자조합인 길드제도가 붕괴되고 공장제수공업인 매뉴팩처로 대치되었으며, 도로․운하․항만 등 교통기관이 건설되어 점차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공장제수공업이라 함은 가내수공업자들이 한 건물 안에 모여 독립적으로 운영하거나 협동생산을 함으로써 외형적으로는 공장제 생산 체제를 갖추었으나, 실제 로는 기계기술이 아닌 수공업 기술에 의존하고 있던 생산 체제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노동자를 많이 고용하는 자본제 생산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소자영업자가 많이 남아있는 과도기적 단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성립요건인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의 계급분화가 아직 확실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봉건제적 생산과 자본제적 생산의 과도기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준비를 해오다 1825년 영국이 그때까지 취하여 오던 기계수출의 금지조치를 해제함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기발명된 기계를 수입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산업혁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속도는 영국에 비해 완만하게 진행되어 자영의 소공업생산자들이 상당기간 잔존해 있었다.

농업부문에서도 혁명의 결과 봉건적 귀족과 승려들이 소유하고 있던 많은 토지가 몰수되어 중소 농업인에게 분배됨으로써 근대적 토지소유제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농경지가 적어, 대표적인 소농 구조를 가진 나라였다. 여기에 산업혁명이 완만하게 진행되어 공업 부분에서 농업 노동력을 충분히 흡수할 만한 여력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소규모 농지를 가진 자영농이 많은 편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영구히 자본가가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생활방위 운동으로서의 소비조합 운동에 가담한데 반하여 프랑스에서는 자영업자들이 아직 이러한 꿈을 갖고 있어 영세한 자영업의 규모를 확대하여 협동함으로써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프랑스 생산 조합 발생의 근원이 되었다.

생산조합의 발생은 후술하는 푸리에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이러한 사상은 필립 붓세로 이어졌으며, 필립 붓세는 1831년 파리에 목공노동자조 합을 세웠는데 이것이 생산조합의 시초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 조합은 그 후 농업 부문에도 파급되었다.

 

2. 프랑스 생산조합의 선구자

프랑스의 생산조합 역시 자국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전을 배경으로 하여 협동 조합운동의 선구자들에 의해 발생하였다. 특히 협동조합 사상은 노동자 생산조합 사상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사상적 기원은 생시몽(Saint Simon)에서 비롯되었다.

그를 협동조합운동의 선구자로 보는 이유는 그의 이론 속에 생산조합적인 구상이 깔려있고 그것이 그후 생산조합을 실제로 일으켜 보려고 시도한 협동조합 운동가들 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주로 이론 전개에 주력하였을 뿐실제 활동은 별로 없었던 반면 푸리에, 붓세, 고딘의 구상은 행동으로까지 이어졌다.

 

(1) 샤를 푸리에(1772~1837)

샤를 푸리에(Charles Fourier)는 로버트 오웬과 더불어 공상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쌍벽이며 또 협동조합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사회가 자유경쟁사회로 발전해감에 따라 약자들은 점점 소외당해 가고 있는데 그것은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로지 집단적 협동체를 조직하여 운영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팔랑주(Phalange)라는 단위조합으로 조직되는 팔랑스테르(Phalanstere)라는 조직체의 창설을 주장하였다. 이 팔랑주는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비하나 생산이 우선되는 일종의 생산조합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중앙에 큰 생활 건물을 설치하고 그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동식당, 목욕탕, 강당, 극장, 놀이시설 등을 만들고 주위에는 농장과 농사를 설치한다.

이와 같은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각 방면의 인사가 모여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이 조합은 농업을 기본으로 하고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여 조합원의 소요 물품을 생산하며, 만일 잉여가 있을 경우에는 다른 팔랑주와 교환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생산의 결과 생긴 이익은 출자, 노력, 지식과 재능에 따라 배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출자, 생산, 소비를 공동으로 할뿐만 아니라 자산에 대한 개인의 소유 권을 인정하지 않고 조합원의 공동소유로 하는 조합사회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새 환경을 만들어감으로써 사회 전체를 개량할 수 있다고 믿고 국가의 원조나 간섭을 배격하였으며 철저한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팔랑주 계획은 출자자가 없어 푸리에 당대에는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후계자들에 의해 점차 실현되어 프랑스 생산 조합의 기초를 세웠을 뿐 아니라, 세계 협동 조합 운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2) 필립 붓세(1796~1865)

프랑스 생산조합의 발생은 이론이나 사상 측면에서는 푸리에의 영향을 많이 받았 지만, 실천은 붓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필립 붓세는 파리 수세국장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에는 의학을 전공하였으나 후에 정계에 투신, 왕정타도 음모에 가담한 죄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에는 열성적인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그는 자본주의 제도의 가장 큰 결함은 노동과 자본의 분리에 있으며 노동자의 빈곤도 그에 기인한다고 생각하여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결합을 1차적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수공업적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나 자본주의적 공장제 공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모두 노동자 생산조합을 통하여 생산수단을 직접 소유함으로써 노동에 의한 수익이 자본가가 아닌 조합원의 것이 되어 빈곤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가 가져온 사회악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조직되는 자유스러운 조합을 구상하고 1831년 파리에 목공노 동자 생산조합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자금부족으로 곧 해산되고 그 후 1834년 파리에서 그의 숭배자에 의해 금속세공 생산조합을 설립하였다. 이 조합은 조합원의 이익이 감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규조합원의 가입을 거부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소자본가의 회사기업체와 유사한 조직체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붓세의 생산조합은 노동자로 조직되었고 그 노동자가 자본과 노동을 제공하여 공동으로 생산하였으며, 거기서 생기는 순이익 중 80%는 조합원이 제공한 노동일수에 따라서 분배하고, 나머지 20%는 공동기금으로 적립하였다.

그런데 푸리에와 붓세의 사상 속에는 다같이 근대적 협동조합의 이념이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양자간에는 다소의 차이점이 있다. 푸리에의 구상이 농업을 기본으로한 자급자족적이고 고립적․공상적인 반면, 붓세는 공업생산을 기초로 자본주의경제 체제 내에서 그 발전과 존재 이유를 발견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3. 생산조합의 발생

협동조합 사상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프랑스의 생산조합은 그후 생성과 소멸을 거듭해오다 1880년대부터 다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노동자 생산조합은 고딘(Godin)이란 사람에 의해 1880년에 처음 설립되었는데 공식 명칭은「이익분배 생산조합」이었다. 이어 1893년에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프랑스 노동자 생산조합 협동은행」이 설립되었는데, 이것은 생산조합에 대하여 금융 지원을 하기 위해 설립된 일종의 특수은행이었다.

농업부문에서도 프랑스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성립 그리고 협동조합 선구자들의 사상을 배경으로 생산조합이 생성․발전하기 시작하였으나, 공업부문 생산조합의 발생에 비해 한 가지 독특한 배경이 있었다.

그것은 19세기말 서유럽을 휩쓴 농업 공황이었다. 19세기말의 1차 농업공황(1875~1896)은 값싸고 풍부한 미국 농산물이 대량으로 서유럽에 유입되어 높은 지대와 생산비를 바탕으로 발전한 서유럽의 곡물생산을 압박한 것을 말하는데, 이 공황으로 서유럽 농업인들은 곡물생산에서 미국과 경쟁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협동조합의 길을 택하게 된 것은 프랑스, 덴마크를 포함한 서유럽 전반의 현상이었다. 생산 품목도 곡물생산을 지양하고 축산, 낙농, 과실, 채소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 서는 농업 부문의 상품 생산이 아직 전면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덴마크의 농업이 해외시장 중심의 판매농협으로 발전한 데 비해 생산수준이 낮은 프랑스에서는 생산합리화를 위해 조합이란 뜻인 농업 상디카(Syndicats)운동, 즉 생산조합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낮은 생산 단계를 벗어나기 위해 농업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생산의 합리화를 위한 공동화를 추진하였는데, 이것이 상디카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상디카 조직이 법적으로 인정된 것은 동업조합법이 공표되면서부터이다. 프랑스 정부는 농업 불황을 타개하는 하나의 방안으로 1884년 동법을 제정하여 상공업자 및 농업인에 대하여 상부상조를 목표로 한 조직화를 허용함으로써 이들의 활발한 발전이 이루어 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상공업 상디카는 고용주 상디카와 노동자 상디카로 분열되어 치열한 계급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정부의 탄압을 많이 받았으나, 농업 상디카는 오직 경제운동을 중심으로 한 생산조합의 발전을 꾀하였기 때문에 프랑스 농협운동의 전신이 되었으며, 이것이 여러 나라로 파급되어 생산조합의 한 유형을 이루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농업노동자의 공동소작청부조합이 생산협동조합 으로 발전하였고, 러시아에서는 혁명전의 알테르(Artel)라는 공동조직이 발생하여 콜호스(Ko1khoz)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동업조합은 농업의 개량․발달과 작업의 공동화를 목적으로 하였을 뿐 공동구매와 공동판매와 같은 경제행위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01년에 법이 개정되어 공동구판사업을 허용하고 상디카 조합원으로 구성되는 신용조합도 조직되어 농업 상디카는 실질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근대적인 농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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